• 최종편집 2024-03-27(금)

이순신 장군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장영권의 위대한 자기혁명(2)] 이젠 '나의 죽음'을 생각하라-최후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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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0.08.15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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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01] 위대한 자기혁명-국가.jpg
어떻게 살 것인가, 이는 결국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문제다. 수많은 삶에서 가장 위대한 죽음은 이순신 장군의 죽음이다. 그는 최후의 순간에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다. 얼마나 극적인가!

 

<1> 이젠 나의 죽음을 생각하라: 이순신 장군의 최후 순간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戰方急愼勿言我死)!”
조선 구국의 영웅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1598년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왜군의 유탄에 맞아 운명하며 남긴 마지막 말이다. 이순신 장군은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 고려 강감찬 장군과 함께 우리나라의 3대 명장이며 가장 위대한 장군이다. 그가 54세의 나이로 전장에서 최후의 죽음을 맞이하며 남긴 유언은 전율을 넘어 숙연함을 준다.


죽음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영웅도, 너도, 그리고 나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음 앞에서 마지막에 무슨 말을 남겨야 할까? 많은 사람들은 이 질문에 다소 머뭇거릴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의식적으로 멀리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죽음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 모든 인간은 다 죽을 수밖에는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장 위대한 죽음을 맞이한 인물이 있을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을 꼽을 것이다. 그는 ‘조선구국’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극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의 간략한 일대기를 더듬어본다.


그는 1545년 4월 28일(음력 3월 8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28세에 무인 선발 시험에 처음 도전했다. 그런데 달리던 말에서 떨어져 왼발을 다쳤다. 결국 시험에 낙방했다. 이순신 장군은 다시 4년 동안 실력을 갈고 닦았다. 32세 무과병과에 합격하여 비로소 처음 관직을 얻게 되었다. 그 뒤 높은 사람에게 아부하길 싫어해서 진급이 늦어졌다. 그러다가 47세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독자적인 자기의 꿈을 펼칠 수 있는 자리에 오른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꿈은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수호하는 것”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먼저 국내외 여러 정황을 파악하였다. 그리고 왜적이 쳐들어 올 것을 미리 감지해 냈다. 이순신 장군은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 등 전함을 만들고 수군을 훈련시켰다. 사람들은 쓸데없는 짓을 한다며 비웃었지만 마침내 1592년 5월 24일(음력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을 이끌고 왜군과 맞서 싸웠다.


이순신 장군은 1592년 6월 16일(음력 5월 7일)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무려 7년간 23번 전투하여 23승이란 전승의 대기록을 작성했다. 마지막 전투는 노량해전이었다. 왜군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1598년 8월 18일 횡사하자 서둘러 철수하려 했다. 이순신 장군은 도망가는 왜적을 한 척도 돌려보내지 않겠다며 비장한 각오로 임했다.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 시작 직전인 1598년 12월 15일(음력 11월 18일) 밤 자정 무렵, 대야에 깨끗한 물을 떠와 손을 씻었다. 그리고 나선 혼자 갑판 위로 올라가 무릎을 꿇고 “이 원수 놈들을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라고 하늘에 빌었다. 이순신 장군은 굳은 결의를 한 후 이틀 간 밤을 새가며 싸웠다. 이순신 장군은 그 다음날 오전 10시경 왜적의 유탄에 맞아 운명하였다.


이순신 장군이 탄 장군선은 명에 따라 죽음을 극비에 붙이고 변함없이 독전기를 흔들며 지휘하였다. 조선수군은 정오까지 왜적을 크게 무찔렀으며, 적선 500여척중 200여 척을 불태웠다. 적병은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고, 살아남은 자들도 포로로 잡히거나 목 베여 죽는 등 대부분 전사하였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23번째 마지막 전투에서도 승리했지만 죽음을 이기진 못했다.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후 명나라 장수 진린이 위기에 처했다. 이순신 장군의 조카 이완이 장군선을 이끌고 그를 구해주었다. 진린은 이를 이순신 장군이 행한 일인 줄 알고 사례하고자 하였다. 이 때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전해 듣고 배 바닥에 주저앉아 “어른께서 오셔서 나를 구해준 것으로 알았는데 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라며 크게 통곡했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지휘 아래서 엄한 군율 때문에 곤욕을 치렀던 명나라 해군 장졸들도 눈물을 흘렸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국내외의 인물들이 내린 평가는 다양하다. 이순신 장군과 함께 싸운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1543년~1607년)은 1598년 조선의 왕 선조에게 올린 글에서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와 나라를 바로 잡은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有經天緯地之才補天浴日之功)”라고 예찬했다.


영국의 해전사 전문가이자 해군중장 출신인 조지 발라드(George Alexander Ballard)는 이순신 장군에 대해 이렇게 서술했다. “이순신의 이름은 서구 역사가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공적으로 보아서 위대한 해군지휘관들 중에서도 능히 맨 앞줄에 설만하다. 이순신 장군을 낳게 한 것은 분명 신의 섭리였다.


이순신 장군은 광범위하고 정확한 전략판단과 해군전술가로서의 특출한 기술을 갖고 있었다. 또한 탁월한 지휘통솔력과 전쟁의 기본정신인 그칠 줄 모르는 공격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그가 지휘한 모든 전투에서 늘 승리를 쟁취하였다.


이순신 장군의 공격은 결코 맹목적이지 않았다. 그는 이러한 점에서 19세기 세계의 바다를 장악한 영국 해군의 넬슨(Horatio Nelson:1758년~1805년) 제독과 유사하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 등 기계발명에 대한 비상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넬슨 제독보다 더 뛰어나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에 대한 존경심은 일본에서 더 강하게 나타났다. 1905년 러·일해전에서 승리한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 일본 제독은 승전 축사를 듣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즉 “나를 넬슨 제독에 비교하는 것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과 비교하는 것은 감당하기 힘들다”라고 강조했다. 도고 헤이하치로는 러·일전쟁에 출정하기 전 전쟁승리를 기원하는 의미로 이순신 장군에게 제사를 지낸 일화는 유명하다.


분명 이순신 장군은 나라와 백성을 구한 영웅이다. 이순신 장군은 왜적과의 싸움에서 23전 23전승으로 모두 승리하였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도 죽음을 이기진 못했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다. 예수도, 부처도, 공자도 모두 죽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도 언젠가는 반드시 죽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떠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가? [국가미래전략가 장영권 지음 '위대한 자기혁명' 24-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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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야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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