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7-02(월)

공부 꼴찌·왕따 소녀, 30세에 100억 사장 됐다…성공 비결은?

청년귀농 이미소 ‘농업법인 밭’ 대표, 강원 춘천서 ‘감자빵’ 개발 ‘기적 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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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2.01.23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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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귀농 출신 이미소 대표가 청년농부 출신 남편 최동녘 대표와 함께 ‘농업회사법인 밭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춘천 감자빵을 출시해 대히트를 터뜨렸다. 이들은 100여 명의 직원들과 함께 ‘좋은 농산물을 올바른 방법으로 제공한다’라는 슬로건 아래 종자의 다양성을 알리고, 지속 가능한 농업을 위해 고민하고, 함께 성장하는 공간인 ‘밭’을 기꾸고 있다. <사진=카페 감자밭>

 

[세계미래신문=장영권 대표기자] “전교에서 공부 꼴찌였던 왕따 소녀30세에 못난이 감자빵으로 연 매출 100억원대의 사업가가 되었다.”

 

언뜻 들으면 기적 같은 일이다. 어떻게 했길래 이같은 일이 가능했을까? 주인공은 청년귀농으로 카페 감자밭을 운영하며 감자빵을 창조한 이미소(31) ‘농업회사법인 밭 주식회사대표다. 어린 시절 이 대표를 알던 이들은 그가 30세의 나이에 연 매출 100억원짜리 중견 회사를 일궈냈다는 사실에 놀란다. ‘주걱턱으로 불리는 안면 비대칭의 얼굴 때문에 왕따를 당하는 등 악몽 같은 초중고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는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꿈을 현실로 창조하였다.

 

이 대표는 흙속의 감자를 흑진주로 창조했다. ‘감자빵2021년 디저트 업계를 강타한 최고의 히트 상품이 되었다. 감자빵은 오븐에 구워 으깬 감자를 감자전분·쌀가루 반죽으로 감싸고 흑임자·콩가루를 묻혀 흙에서 갓 캐낸 것 같은 감자 모양의 빵이다. 빵 껍질은 떡처럼 쫀득쫀득하다. 속은 구수한 감칠맛과 함께 자연스러운 단맛이 별미다. 입소문이 삽시간에 퍼지면서 2021년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도 640여만개가 팔렸고, 연 매출 100억원을 돌파했다.

 

감자빵을 사려고 강원도 춘천 외진 곳에 있는 카페 감자밭을 찾은 손님은 60만명에 달했다. 이 대표는 몰려드는 손님을 감당하지 못해 멀리서 찾아온 손님이 맛이라도 볼 수 있도록 하자1인당 구매 개수를 최대 3개로 제한하기도 했다.” “그러자 손님이 옷을 여러 번 갈아입고 재구매하러 오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웃으며 춘천 감자빵의 위력을 털어놓기도 했다. 이 대표가 판 것은 감자가 아니라 꿈과 가치, 미래였다.

 

이미소 대표의 놀라운 감자빵 창조이야기는 그가 202111월에 펴낸 책 <오늘도 매진되었습니다-생각하는 사람이 아닌 행동하는 사람의 힘>(필름)에 보고서처럼 잘 소개되어 있다. <조선일보> 등 언론도 그를 주목하여 크게 보도하기도 했다. 흙수저 출신에 주걱턱으로 왕따였던 여성이 30세의 나이에 100억원대 매출 회사를 일궈낸 과정에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보냈다. 책과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중심으로 그의 성공과 꿈의 창조를 추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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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소 대표가 흙속의 감자를 흑진주로 창조한 ‘감자빵’이다. 2021년 디저트 업계를 강타한 최고의 히트 상품이 되었다. 감자빵은 갓 캐낸 것 같은 감자 모양의 빵으로 껍질은 떡처럼 쫀득쫀득하고 속은 구수한 감칠맛이 난다. 입소문이 삽시간에 퍼지면서 2021년 연 매출 100억원 돌파의 주인공이 되었다. <사진=카페 감자밭>

 

그의 과거: 주걱컥 비대칭 얼굴로 왕따학교 성적도 꼴찌

 

이미소 대표의 청소년기는 고통, 그 자체였다고 한다. 그는 책에서 “‘턱 기형아’ ‘마귀할멈’ ‘왕따. 초중고 12년 동안 청소년기를 내내 따라다닌 수식어들이었다고 고백했다. 춘천의 작은 동네에서 유명한 턱 기형아가 이미소였다. 아래턱이 21나 튀어나왔었다. 윗니와 아랫니 사이로 다섯 손가락이 다 들어갔을 정도였다. 라면도 씹지 못해서 가위로 잘라 먹어야 했다. 더구나 ADHD(주의력결핍 과다행동장애)를 의심받을 만큼 집중력이 없어서 선생님들에게 늘 지적받았고, 학교 성적도 꼴찌 수준이었다.

 

이 대표는 <조선일보>내 아이큐가 103으로 낮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낮은 아이큐가 나에게 큰 장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완전히 이해할 때까지 집요할 정도로 파고든다. 그는 외톨이 시절은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지만, 나를 성장하게 했고, 온전히 나 자신에게 집중하게 했다. 누구보다 명확한 꿈을 가지고 살게 된 것도, 남과 비교하지 않고 나를 사랑하며 살게 된 것도 그때의 경험 덕분이었다고 밝혔다. 늘 확고한 꿈을 갖고 자신을 사랑하며 엄청난 노력을 해온 것이다.

 

이 대표는 아버지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지지하고 사랑해주셨다. 아버지는 성적표를 보고 네가 꼴찌를 하니, 누군가는 1등을 하겠지라며 껄껄 웃으셨다. 그러곤 너는 네 인생의 하나뿐인 주인공이니, 네가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라고 덧붙이셨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힘든 상황에서도 나를 무조건 지지해주는 부모님이 있어서 외롭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 대표는 이런 아버지의 영향으로 고등학교 때는 열심히 공부했다. 그 결과로 서울 세종대 패션디자인학과에 수석 입학했다. 20세가 되면서 주걱턱 수술을 받아 정상적인 외모도 갖게 되었다. 그런데 대학 1학년 말 패션디자인은 자신의 길이 아님을 깨달았다. 패션디자인을 하기엔 감각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대신 기획을 잘하고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됐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서울 강남의 IT기업 신사업 기획부서에 입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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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감자빵이 맛있다”고 입소문이 나면서 전국에서 사람들이 2020년 8월 감자밭 카페에 몰려와 빵을 사기 위해 긴 줄을 만들고 있다. <사진=카페 감자밭>

 

그의 성공: 감자빵 창조 위해 200여번 도전 실패 반복

 

어려운 취업문을 뚫고 잘 나가던 이미소 대표에게 인생 대반전이 생겼다. IT업체에서 일한 지 고작 6개월이 지났을 때 고향 춘천에서 감자 농사를 하던 아버지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미소야, 회사 계속 다닐 생각이니? 올해 수확한 감자 30t(15000만원 어치)을 전부 묻어야 할 것 같다. 네가 와서 한번 팔아보면 어떻겠니?” 이 대표는 감자가 아버지의 모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감자를 판다는 것은 아버지의 꿈과 가치, 정신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었다.

 

이 대표는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한동안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그의 청년귀농에 대한 결심은 오래 가지 않았다. 고향에 돌아가 나를 사랑과 믿음으로 격려해준 아버지와 함께하는 것도 좋은 삶으로 판단했다. 당시 26세였다. 이 대표의 아버지는 식량 주권, 감자의 다양성 보존을 위해 품종을 개발하고 보급하는 문제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강조해 왔다고 한다. 2012년에는 투자하던 감자 회사가 망하자 모든 감자 종자를 사비로 사들여 재배해 왔다. 그러나 아버지가 재배한 품종의 감자는 맛도 의미도 좋았지만, 소비자의 마음을 파고들지 못했다.

 

이 대표는 고향 춘천으로 내려가 3년여간 감자와 좌충우돌하며 악전고투를 벌였다. 산처럼 쌓인 감자를 팔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더구나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 대표는 이러한 농업의 구조적 모순과 타협하지 않고 저항하며 자기만의 새로운 생존 루트 개척에 나섰다. 일차 작물을 생산하는 농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수확한 감자를 가공해 2, 3차 상품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이 대표는 이를 위해 감자 농사에 대해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무수한 시도를 했다. 그는 지속 가능한 감자 농사를 지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물었다. 그리고 감자로 고객과 소통할 수 있는 매개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답을 찾았다. 그리고 다시 그렇다면 지속 가능한 매개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또 질문했다. 이렇게 생각과 질문, 답변을 반복하며 찾은 창조물이 바로 감자빵이었다.

 

이 대표가 창조한 감자빵은 그냥 도깨비 방망이의 요술처럼 뚝딱 나온 것이 아니다. 그는 처음에 아버지와 함께 새벽 6시부터 밤늦게까지 열심히 감자 농사를 지으며 활로를 모색했다. 그러나 소비자들은 낮선 감자들을 계속 외면했다. 이 대표는 계속된 절벽을 보고 농사를 지어 가락시장에 내놓는 것이 21세기 농부의 역할이 아니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고객과 소통하고, 플랫폼을 구축하고, 농산물을 가공해 소비자를 만나는 것이 지속 가능한 농업을 구현하는 길“이라고 판단했다.

 

이 대표는 이때부터 감자를 이용한 새로운 제품 창조에 나섰다. 처음부터 감자빵을 떠올리진 못했다. 모든 조리법을 총동원해 2년 넘는 기간에 200종이 넘는 감자 음식을 만들었다. ‘삽질 삼매경이 이어졌다. ”춘천 하면 닭갈비가 가장 유명하니까, 감자와 닭갈비를 활용한 파이를 만들어 보기도 했다. 반응은 나쁘지 않았지만, 감자이기에 느낄 수 있는 고유한 매력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돌연 감자와 똑 닮은 감자빵을 만들어보라고 했다.

 

이 대표는 아버지의 제안에 따라 감자의 본질에 집중하고 함량을 최대한 올려서 감자 모양의 빵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빵 전문가 홍상기 요리장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감자빵을 완성했다. 홍감자, 청강, 흰감자 같은 다양한 품종의 감자를 적절히 배합했다. 그리하여 아이 주먹만 한 크기에 울퉁불퉁한 생김새, 겉에 뭍은 검은깨가 처럼 보여 영락없이 밭에서 갓 캐낸 감자가 태어났다. 사람들은 실물 감자같은 못생긴 빵을 신기해하며 관심을 보였다. 처음엔 잘 팔리지 않았지만 점차 입소문이 나면서 긴 행렬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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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소 대표가 운영하는 ‘카페 감자밭’의 뜰에 있는 정원에 2021년 9월 해바라기와 맨드라미가 활짝 피어있다. ‘꽃 따러 오는 밭’ 일명 꽃따밭에서 “식물과 교감하며 자연이 소중함을 배우는 밭으로 오라”고 소개하고 있다. <사진=카페 감자밭>

 

그의 미래: “사회문제 해결에 기여하는 회사, 그게 목표다

 

이미소 대표는 2020년 동갑내기 청년농부 최동녘씨와 결혼했다. 남편은 강원도 농부의 아들로 한국농수산대학교를 졸업하고 양구에서 유기농 사과농사를 짓고 있었다. 함께 농업법인을 설립하여 부부가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남편 최동녘 대표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고 아내 이 대표는 경영을 맡아 역할을 분담했다. 최 대표는 카페 뒤에 꽃을 심어 손님들이 밭에 들어가 원하는 만큼 따 꽃다발까지 만들 수 있는 일명 꽃 따러 오는 밭(꽃따밭)’ 개발 등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감자의 이름을 높였다.

 

이 대표와 최 대표, 두 청년농부에게 2021년은 기적창조의 해였다. 감자빵이 초대박이 되면서 신규 직원을 크게 늘린 것이다. 이 대표는 우리 회사(농업회사법인 밭) 직원이 100명 좀 넘는다고 했다. 평균연령이 30대 초반이다. 그러나 강원도 양구 감자공장에는 껍질 까는 고령의 여사님들이 12명이 있다. 제일 나이 많은 여사님 직원이 84세다. 이 대표는 얼마 전 근로계약서를 썼는데, ‘여사님들 은퇴하시는 나이가 우리 회사 정년이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놀라운 상생공영의 기업이다.

 

이 대표는 요즘 청년들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일을 하는 게 아니다. 자신이 성장한다고 느끼는 게 중요한 것 같다고 말한다. “연봉이나 물질적 혜택뿐 아니라, 공감하는 가치와 지향점이 일치할 때 조직원은 진정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리고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대표는 회사는 물론 개인의 성장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 그리고 일을 재미로 느낄 수 있도록 좋은 사람들로 조직을 구성해줘야 한다고 덧붙인다.

 

이 대표는 회사의 미래성장 전략에 대해 앞으로 회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어떤 회사가 되어야 할지 철학을 고민하는 게 지금 나와 남편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그는 지방에서도 서울 못지않은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한다면 청년문제, 저출산문제 등 다양한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만든 사업 모델이 성공하고 확장되면 우리 사회의 문제들도 해결될 수 있다우리의 방식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회사, 그게 나의 목표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이소미 대표의 성공 창조에는 많은 것들이 동원되었다. 가족 사랑, 고통·시련 극복, 긍정 마인드, 무한 도전, 협업과 공유 연대 등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한 기업을 창조했다. 그는 책에서 한 번쯤은 가족을 위해 살아도 괜찮다라고 밝혔다. 그는 실패의 벽에서 혁신을 꿈꾸었다. 그리하여 천편일률적인 감자 농사의 판을 뒤엎고 새판을 잤다. 이 대표는 특히 혼자가 아닌 팀이라서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사실 그의 성공에는 아버지, 남편, 직원 그리고 무수히 많은 고객들의 격려가 힘이 되었다.

 

청년귀농 농업 사업가 이미소 대표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세계창조재단은 이와 관련 창조 5대법칙을 제시했다. 그것은 첫째 구체적인 꿈과 비전을 창조하라. 꿈과 비전은 창조 엔진이다. 둘째는 추진전략을 창조하라. 창조는 속도와 방향, 높이가 맞아야 한다. 셋째는 창조적 실행을 하라. 모든 것은 행동해야 이루어진다. 넷째, 창조적 반성과 평가를 하라. 잘못을 혁신해야 바른 길로 갈 수 있다. 끝으로 성공할 때까지 반복, 재도전하라. 꿈의 현실 창조는 꿈꾸고 도전하는 사람의 것이다.

 

장영권 대표기자는 평화의 땅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다. 고려대에서 정치학석사, 성균관대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평화이론가, 평화사상가, 평화행동가이자 세계창조전략가다. 평화복합체론, 지속 가능한 평화론, 미래예측모델, 세계국가연합론 등 독창적 연구와 성과를 만들어냈다. 현재 세계미래신문 대표기자로 세계지도자연합 공동의장, 한국미래연합 대표, 국가미래전략원 대표, 대한건국연합 대표, 녹색미래연대 대표, 한국국제정치학회 이사, 국제미래학회 미래정책위원장 등을 맡고 있다.

 

인류는 현재 자연환경의 악화, 과학기술의 진화, 인간의식의 퇴화, 국가안보의 약화 등 4대 미래변화 패러다임의 복합적 도전으로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의 생존과 국가미래비전, 대전략을 제시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또한 전 지구적 차원의 문제해결과 인류의 상생공영을 위한 세계국가연합창설을 주창하고 있다. 저서로는 <불멸의 창조-호모 크리에이터 시대가 온다(근간)>, <위대한 자기혁명>, <대한민국 미래지도>, <대한민국 미래전략>, <지속 가능한 평화론>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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